스포츠의 문을 열고, 그 판을 바꾼 여성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스포츠를 사랑했지만 한국과 프랑스에서 오
세계 여성의 날 특집 : 올림픽에 맞선 여자, 올림픽에 처음 선 여자🥇
밀라노 동계올림픽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 휘슬레터는 조금 특별하게 준비했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스포츠의 판을 바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밀라노 동계올림픽에 이어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는 지금, 스포츠의 역사 속에서 한동안 잊혀졌던 두 명의 여성 스포츠인을 다시 떠올려 보려 합니다.
한 명은 여자 육상 종목의 올림픽 채택을 막았던 IOC에 맞서 세계 여자대회를 창설한 프랑스의 알리스 밀리아(Alice Milliat, 1884–1957).
또 다른 한 명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채 되지 않던 1948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여성 선수 박봉식(1930–1950)입니다.
스포츠의 문을 열고, 그 판을 바꾼 여성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스포츠를 사랑했지만 한국과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두 여성 스포츠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오늘의 이야기
1. IOC에 맞섰던 투사 ‘알리스 밀리아 Alice Milliat’
2. 한국 최초의 여성 올림피언, 박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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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꿈의 구장' 웸블리 8만 관중 앞에 서다! 한국의 첫 여성 올림피언 박봉식 / [별별스포츠 #88] / 스포츠머그
✔️ 보석처럼 반짝이다 너무 일찍 스러진 한국 최초의 ‘여성 올림피언’ 박봉식. 경향신문 2019.7.25
✔️ 박봉식(朴鳳植)의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사. 조준호, 하웅용. 한국체육사학회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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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IOC에 맞섰던 투사 ‘알리스 밀리아’(1884-1957)
✅ 알리스 밀리아는 누구인가?
- 1884년생인 알리스 밀리아는 스포츠를 즐기는 여성을 '거칠고 미친 여자'로 보던 시절에 조정, 수영, 하키에 능숙한 만능 선수였고 조정경기에서 입상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함
- 1911년 여성스포츠진흥을 위해 설립한 단체(Fémina Sport)에 가입해 여성의 스포츠권리에 앞장서면서 '스포츠계의 서프러제트(suffragette)'로 불렸음
- 서프러제트는 참정권을 뜻하는 서프러지(suffrage)에 여성 접미사 ‘-ette’를 붙인 말로 20세기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과 운동가들을 지칭함
- 당시 올림픽 종목을 보면 1900년 파리 대회부터 여자 테니스와 골프가 정식 종목이었고 이후 수영과 양궁 등이 추가되었지만 정작 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육상은 1927년까지 여자선수의 출전이 허용되지 않고 있었음
✅ 올림픽에 여자육상을 넣어 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하자 따로 대회 개최
- 알리스 밀리아는 1919년 IAAF(세계육상연맹)을 통해 다음 올림픽(1924년)부터 여자육상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IOC(위원장 쿠베르탕)로부터 거절당함
- 이에 반발한 그는 1921년 ‘제1회 세계 여성체육 및 육상대회’라는 긴 명칭의 대회(3월24일-31일)를 모나코(몬테카를로)에서 개최했는데 이 대회의 별칭에 ‘올림픽’을 넣어 Olympiades Féminines/Jeux Olympiques Féminins 여성 올림픽임을 연상시킴
- 10개의 육상종목과 2개의 시범종목(체조, 농구)이 포함된 이 대회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노르웨이 등의 5개국에서 당대 스타플레이어를 포함한 1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해 성황리에 종료됨
- 대회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밀리아는 여성올림픽을 추진하게 되는데 1922년 8월 10일 파리에서 열렸던 제1회 여성올림픽에는 2만명의 관중이 몰리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로부터 다음 대회(1926년 스웨덴) 참가 신청을 받기 시작함
✅ 위기감 느낀 IOC와 협상
- 당시 IOC는 주최측(FSFI)이 대회 명칭에 ‘올림픽’이라는 단어를 넣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는데 파리대회(1922)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위기감을 느끼고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함
- IOC는 밀리아와 총11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올림픽’이라는 명칭을 빼고 다른 타이틀로 변경하라는 요청을 했고 밀리아는 올림픽 육상 전종목에 여성선수 참가허용 등의 조건을 내걸었음
- 수년간 이어진 줄다리기 끝에 대회명칭에서 ‘올림픽’을 빼고 ‘세계’로 바꾸는 대신 1928년 올림픽부터 10개의 여성종목을 추가한다는 합의에 도달함
- 1926년 스웨덴에서 열린 대회의 명칭은 ‘여성 세계 대회 Women's World Games’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34년 런던대회까지 이어진 후 해산됨
✅ 자신이 만든 대회의 타이틀과 올림픽 여성종목의 확장을 맞바꾼 여걸
- 당시 장기간 IOC위원장(5대)을 맡았던 에이버리 브런디지(1887-1975)는 밀리아에 대해 “끊임없이 요구하는 성가신 존재”로 평가하며 그녀가 스포츠계의 여자 전사였음을 인정했음
- 밀리아가 쟁취한 올림픽 여성종목의 확장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1957년 세간에서 잊힌 채 타계한지 64년만인 2021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파리에서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짐
- 여성 스포츠계가 이 여인을 기억해야하는 이유는 만일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올림픽에 여자 육상이 훨씬 늦게 들어갔을 수도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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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한국 최초의 여성 올림피언, 박봉식(1930-1950)
✅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의 올림픽 참가
- 갓 독립한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런던올림픽 참가자격도 우여곡절 끝에 얻었는데 당시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못 미쳤기 때문에 올림픽 후원회가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하여 대표팀 경비를 조달하였음
- 어수선했던 당시 각 경기단체는 메달획득 가능성이 있는 종목을 선별하여 총 67명의 선수와 임원으로 구성된 올림픽대표팀을 꾸려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여기에 뽑힌 유일한 여성이 당시 18세의 박봉식
✅ 17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첫 여성 올림피언으로 선발
- 만능 운동선수이면서 이화여중 재학시절 원반던지기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박봉식은 올림픽대표 선발 1차전(1947년 5월10-11일)에서 31m72㎝를 던져 2위를 기록했고 이어진 선수권대회(9월12일)에서
32m48㎝, 그리고 최종선발전에서 1위를 기록하며 당시 숙명여대 재학생이었던 1인자 김옥자를 제치고 대표로 선발됨
- 1945년 남자부 원반던지기의 최고기록은 33m 85였고, 1946년 부청 소속의 인강환이 전국체전 남자부에서 기록한 원 반던지기 한국신기록은 39m 88이었는데 그녀의 37m 기록이 당시 남자선수들 기록과 큰 차이가 없었음
- 당시 동아일보는 “여성스포츠의 세계적 진출이 남보다 늦은 우리 조선에 있어서 더욱 여성스포츠를 발전케 하여야 할 오늘에 있어 박봉식의 올림픽파견 문제는 조선 여성체육 발전의 앞날을 위하여 중대한 의의가 있을 것” 이라며 높이 평가 (동아일보, 1948.4.28.)
- 경향신문은 “오직 한 여성으로서 조선을 대표하여 첫 번째 국제적 무대로 등장할 이화여중 박봉식양”으로 보도(1948.6.13)
- 대표로 선발되어 합숙훈련 기간 중에 열렸던 경기에서도 조선신기록을 이어가던 그를 당시 언론은 그녀의 기록도 기록이지만 ‘17세의 나이, 20세가 안 된 묘령의 나이’라는 표현으로 미래에 더 성장할 선수임을 강조하였음
✅ 당시 그녀의 인기는 김연아급
- 그녀가 런던대회에 출전할 당시를 어머니농구회 회장을 맡았던 박정숙(92)은 다음과 같이 회상
“그때 봉식이의 인기는 지금 김연아보다 더 대단했어요. 이화여중에서는 농구코치 이상훈 선생님과 함께 봉식이, 이렇게 둘이 런던 올림픽에 갔는데, 가기 전에 전교생이 봉식이 손 한번 잡아보자는 등 인기가 엄청났습니다. 미끄러지듯이 원반을 던지는 봉식이의 모습은 마치 묘기 같았어요” (2020년 6 월 3일)
당시 박봉식은 올림픽 출전 소감을 "가슴이 벅차서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힘껏 잘 싸 우고 오겠습니다" (조선일보, 1948.6.22.)”
“혼자 외롭지 않겠냐? 그리고 먹는 것은 무얼 가져가느냐?” 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함
“외로워도 그저 힘 끝 싸울 작정입니다. 정말 동무 한 사람만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없는 걸, 식사는 뭐 별거 없어요. 그저 고추장, 고기포 외 좀 갖고 갑니다. 네 고맙습니다. 힘껏 싸우겠어요" (부인신보, 1948.6.22.)
✅ 1948년 7월 30일 런던 웸블리 경기장 3시30분 원반던지기 출전
- 당시 출전한 그녀의 모습을 보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음
“멀리 봐도 앳되어 뵈고 키가 자그마한 박양은 침착하게 그러나 긴장된 표정으로 원반을 던졌다. 원반이 훨씬 높이 공중으로 솟았다가 꽤 멀리 나와 떨어졌는데 아깝게도 반칙이었다. 첫 번으로 던진 것이 반칙이 되자 박양은 당황해지는 눈치였다. 박양은 두 번째에 33m 80을 던졌다. 이렇게 박양의 기록은 종전보다 훨씬 떨어졌음을 알자 우리 응원석(應援席)에 서는 응원하는 소리를 높였다. 관중석에서 우창환 군의 선창으로 ‘플레이 플레이 박봉식’, 3차 시도마저 파울이 되면서 박양은 아깝게도 입상하지 못했다. 박양이 국내에서 지었던 기록보다도 훨씬 못한 기록이었다” (평화일보, 1948.9.28)
- 런던 올림픽 출전을 마치고 8월 26일 귀국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함.
"응원하여 주신 동포 여러분과 특히 800만여성을 대표해서 나갔던 만큼, 미안한 말씀 무어라 말할지 모르겠어요” (대한일보, 1948.8.28.)
- 이후 1949년 대회에 출전하여 국내신기록(39.65m)을 경신했지만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뇌수막염으로 꽃다운 나이에 사망함
✅ 그녀를 기억하는 이의 회상
- 참고로 그녀의 1948년 런던올림픽 경기모습은 2012년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64년만에 SBS에서 처음으로 발굴했음
- 어머니 농구회 전임 회장 박정숙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그녀를 회상했음
“봉식이는 운동을 다 잘했어요. 걔는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요. 나랑 농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봉식이는 키도 크고 늘씬해서 농구부에서 센터를 맡길 바랐죠. 근데 농구에는 흥미가 없고, 투포환이나 육상 등을 잘했어요 " (2020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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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역사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휘슬은 스포츠를 사랑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숨겨진 여성 스포츠의 이야기를 매주 금요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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